까만 샌들과 목이 길어 더 슬픈 하얀 스포츠 양말. 찰싹 붙는 쫄티 덕에 ‘밴드’라도 붙여주고 싶은 부푼 앞가슴은, 이미 90년대부터 여름이면 여성계에서 주창하는 남침(男侵)의 단골 소재였다. 하지만 국토와 산하를 방어코자 애쓴 그녀들의 호국정신 탓이었을까? 최근 거리를 다니며 느낀 결과, 그런 무장(無裝)한 사내의 상당수는 대부분 괴멸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오히려 젊은 남성들 사이에 유행인 달라붙는 셔츠와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가, 요롱숏달(긴 허리와 짧은 다리)이라는 한민족의 특성을 여과 없이 드러냄이 더 큰 문제로 보이니까.
하지만 여인들의 의지의 승리는 리펜슈탈의 영화가 그러했듯 그리 오래지 않았다. “요새 비가 오지 않아 통 볼 수 없는, 도심 속 카우걸(cowgirl)들이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라고 읊조리던 누군가의 말끔한 고백처럼. 최근 사방 청년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여름철 숙녀들의 부츠 열풍은 얼마나 거셌던가? 특히 맑은 날 무릎까지 덥힌 외국산 고무장화는, 보는 이에게 질척한 풋살 냄새를 상상케 하는 동시에, 중장의 지시로 휴가를 반납하고 태안에 기름 닦으러 간 소총수, 혹은 구제역으로 죽은 돼지를 파묻으러 모인 하급공무원을 연상시키기 충분했다.
이토록 남과 여가 소맷부리를 겨눠온 여름철 패션공방은, 최근 맥킨지도 아닌 매카시로 씻김굿을 하는 정가(政街)의 일차원적 대치와 비교해 볼 때,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대체로 옷이란 ‘귀찮은’ 것 또는 늘어난 뱃살을 대면하게 하는 ‘불편한’ 것쯤으로 추구하는 남성들에게, 정장이란 아직 회사에 붙어 있음을 증명하는 재직증명서이자 비즈니스를 겸하는 양수겸장의 드레스코드니까. 그렇게 교련복은 군복으로 또 교복은 양복으로 환복한 뒤 재집결했다. 특히 네모난 말발굽 구두와 담배 한 갑이 들어가면 딱 좋은 주머니 달린 와이셔츠. 그리고 종종 들뜬 기분을 내고 싶을 때 매는 반짝이 타이 등은 이미 우리만의 한복(韓服)으로 그 지위를 공고히 하지 않았던가?
한편 우리의 여성 동지 또한 ‘합리적 의사결정’의 주체라는 경제학적 기본가설을 깡그리 무시한 ‘샤테크’ 혹은 ‘5초백’의 대상으로, 자신의 체형이나 인상에 맞는 코디가 아닌 단순한 고객으로 그 지위를 다져왔다. 마치 이삿짐을 풀기 무섭게 짐 보따리를 싸서 새 아파트로 떠나던 그녀의 어머니처럼. 침침한 아파트에 살아도 도강에 성공했음에 가슴 뻐근해 하던 여인의 딸들은, 세월이 흘러 바다건너 특정 회사의 주가(株價)를 걸머진 채 외출과 홍보를 겸임한다.
모두 아는 제품으로 늘 대세와 유행을 열심히 좇는 그녀. 그리고 그런 여자 곁에 요상한 양복차림으로, 종종 그녀의 가방을 파킹 중인 그. 이렇듯 아직 제대로 된 의상철학도 혹은 지각 있는 소비자도 부재한 우리에게 해마다 여름이면 반복되는 패션 테러는, 지하 환승통로에서 ‘짝퉁 떨이’중인 장사꾼의 웅변으로. 또 홍콩 대로변 나직이 “시계 있어요~“라고 외치는 인도계 삐끼의 접근으로 종전이 아닌 휴전의 아픔을 곱씹게 하고 있다. 원래 현충일인 양력 6월 6일은 망종(芒種)으로, 일 년 중 씨 뿌리기에 가장 알맞은 날 아니던가? 특히 ”매실은 망종 이후에 사라“라는 옛 말처럼. 비이성적 과열을 쉽게 재테크라 포장하기에 앞서, 충분히 조정된 가격으로 수매에 나서는 것은 어떨런지. 함부로 먹은 풋과일이 토사곽란을 불러오듯, 체면과 욕심이 부른 과소비 끝이 버블임은 이미 역사를 통해 증명 됐으므로.
차평철
magazyn.co.kr 에디터


